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인물 (문단 편집) == 정계의 일원이 된 민간인 == * [[얄마르 샤흐트]]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엄청나게 유능한 천재였다.[* 기존 화폐인 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의 치환하는 화폐 개혁을 통해 [[독일국]]의 초인플레이션을 단번에 진정시켜 독일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도록 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이 의도적인 디플레이션과 내핍으로 독일의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려다 실패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실각하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본인은 기업과 결속하여 메포 어음을 발행하고 신뢰도가 높은 [[라이히스마르크]] 통화로 독일국 정부가 직접 어음을 상환할 것을 보장함으로써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덕분에 독일국은 산업 역량을 다시금 키워나가고 군대를 양성했다. 허나 곧 히틀러 정권은 이와같은 단물만 보고 메포 벡셀의 발행을 무진장 남발했고, 결국 상환 보장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침략을 통한 전시 약탈 경제를 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상환 역량을 넘어서는 군대 양성은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샤흐트는 좌천되었고, 후임에 발터 풍크가 임명된다. 애초에 2차대전의 개전 목적 자체가 전시 약탈 경제를 통한 국가 발전이었기에 전쟁범죄를 필연적으로 수반했다.] 전범 재판에서 아이큐가 '''143'''이 나왔을 정도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을 잡을 정도로 유능했던 인물이지만 히틀러를 만나서 팔자가 꼬였다. 전범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1970년 6월 3일 사망했다. * [[레니 리펜슈탈]] 그 유명한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의 감독으로 나치즘 선전 영화를 찍었다. 그녀는 분명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재능을 좋지 못한 곳에 써 먹었기에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죽기 직전 그녀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알베르트 슈페어]]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것은 알베르트 슈페어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히틀러와 친했던 인물이며 독일의 건축가이자 군수장관이였다. 훗날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면 세울 세계 수도인 '게르마니아'라는 도시를 설계한 사람이다. 그리고 네로 명령을 거부하는 등 나름 상식적인 면도 있었다. * [[페르디난트 포르셰]]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창업자. 히틀러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전차개발에도 참여했다. * [[발두어 폰 시라흐]] [[히틀러 유겐트]]의 총 책임자이다. 자신의 나치 행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참회하였다고 한다. 이로인해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와 달리 사형을 피해갔다. * [[마르틴 하이데거]] [[철학]]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지만 나치 독일에 찬성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래도 나치 독일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지 않아서 여러 모로 논란이 있다. * [[카를 슈미트]] 독일의 법학자이자 나치 당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논쟁, 헌법학에서의 결단주의 등 민주주의의 취약점 등을 예리하게 파헤친 명저들을 남겼으나,한편으론 자신의 사상을 나치의 이념적 기반으로 생각했고, 총통의 정당화가 특히 독재자의 개념을 통한 법철학에 대한 고려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슈미트는 나치 독일 체제의 정당성과 법체계를 확립해 준 인물이다. 그는 ‘[[장검의 밤]]’을 “가장 고결한 행정적 정의의 형태”(höchste Form administrativer Justiz)라고 정당화했으며. 급진 반유대주의자로서 "독일 법이 유대 정신(jüdischem Geist)의 오염에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 "유대인 학자가 발표하는 모든 논문에는 유대인임을 상징하는 작은 심볼이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테오도어 모렐]] '''히틀러의 주치의'''이다.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졸지에 나치 독일의 패망에 기여한 인물이다. 의사로써의 실력은 돌팔이에 가까웠지만, 생체실험 등 인륜을 저버리는 짓은 절대 반대하였다. 나치의 열렬한 신봉자였지만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고 출세를 위해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보니 뇌졸중에 시달리던 상태를 감안해도 감옥에 가둘 명분도 죄목도 없어서 운 좋게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0/Heinrich_Hoffmann_cropped.jpg?width=300|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 (1885년 9월 12일 - 1957년 12월 15일) 히틀러의 사진사로 히틀러의 선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히틀러와 처음 만나게 된 일화는 꽤나 흥미롭다.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있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히틀러의 축재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우리가 자주 보는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다. 그리고 히틀러만이 아니라 의외로 연합군 측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는데 바로 '''[[테오도어 모렐]]을 히틀러에게 소개한 것이다....''' 나치가 패망한 후 나치당원으로 일하면서 폭리를 취한 죄로 10년 징역을 받는다. 1957년 12월11일 뮌헨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4/Bundesarchiv_Bild_183-R41953,_Ernst_Hanfstaengl.jpg/220px-Bundesarchiv_Bild_183-R41953,_Ernst_Hanfstaengl.jpg|에른스트 한프슈탱글]](Ernst Hanfstaengl) (1887년 2월 2일 - 1975년 11월 6일) 나치당 초기 인사로 히틀러의 중요 후원자 중 하나였다. 키가 190cm가 넘었고 영어도 능통했고 학벌도 좋아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는지 피아노를 굉장히 잘 쳤으며, 뮌헨에서 미술 전문 출판사를 운영했다. 게다가 부모님들이 두분 다 대단한 미국 명문가 출신이었고 본인도 엄청난 부자였다. 또한 히틀러에게 뮌헨 상류층 인사들을 소개하고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도 잡아주었다. 그러나 잘난 놈 싫어하는 괴벨스와 많이 다투었고. 이후 히틀러의 과격한 행보에 불만을 품어 마찰을 빚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이 들어서자 신분의 위협을 느끼고 나치의 열렬한 팬이 된 아내와 자식을 두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적국인으로 투옥되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워싱턴으로 망명, 연합군 고문이 되었다. 미드 《히틀러 : 악의 탄생》에서는 사실상 또 다른 주인공쯤 되는 역할을 맡았는데, 처음에는 유대인 친구들이랑도 사이 좋게 지내고 나름 고위층으로 적당히 살다가, 한 유대인 친구가 '히틀러라는 또라이가 있는데 한 번 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제안해서 같이 갔다가, 그 연설을 듣고 유대인 친구는 썩은 표정을 하는 가운데 본인은 박수를 치며 매료되어 버렸다. 이후 개인적으로 히틀러를 찾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고위층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후원까지 받게 해주는데 심지어 그 멤버 중에 괴링도 있었다. 이후 나날이 세력을 더해가는 나치에서 공보부 장관직까지 받지만 자신보다 더 나치에 열광하는 아내와 점차 광기를 띄기 시작하는 나치에 회의감을 느끼고 독일을 떠난다. 사실 막판에 정신을 차린 것 뿐이지, 이 인간이 위에서 말한 고위층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아돌프 히틀러가 재벌들의 빽을 업고 세력을 확장하였으므로 나치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인물이다. * [[그레고어 슈트라서]] 독일의 정치가이며 나치당의 간부였다.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에 가까웠기에 당내 좌파를 이끌었다. 그렇기에 우파였던 괴링과는 대립이 심했다. 한편, 나치당 내에서도 꽤나 상식인이었다고 하며 그 미치광이 집단 중에서도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장검의 밤]] 때 숙청 당했다. *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3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지휘계의 거장'''으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인물이다. 나치당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나치당이 원하는 대로 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나치당에 협력하고 나치의 사상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 음악가지만 유대인 며느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의 협력자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는 동정 여론도 있고 국가 음악국 총재로서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치 부역자' 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총재를 역임할 동안 나치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의 신경을 거슬렀던 파울 힌데미트 같은 음악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행동으로 괴벨스를 자주 빡돌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나치에 협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의 지휘를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무작정 까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음악적인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며 제 발로 직접 나치당에 입당한 기록이 밝혀졌다. 굳이 말하자면 대단한 나치 수괴는 아니었더라도 파시스트 사상의 동조자였다는 비판이 있다. * [[발터 도른베르거]] 폰 브라운의 상관으로서 독일 로켓개발의 총책임자. 친위대 소속이었던 브라운과 달리 그는 독일 국방군 소장이었으며 이에 따라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지만 재판에 회부된다. 베르너 폰 브라운의 죄까지 덮어 썼다는 의견도 있다. * [[베르너 폰 브라운]] 독일 출신의 미국인 로켓 과학자이며 나치 독일에서 [[V2]] 로켓을 처음 개발하였고 이후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머큐리 계획, 아폴로 계획의 우주개발을 책임졌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치의 잔혹 행위에는 모두 눈을 감아버렸다는 비판이 있는 과학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